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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위기의 경제 저널리즘



저널리즘의 전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저널리즘의 외형은 긴 겨울 끝에 피어나는 봄꽃처럼 보인다. 종합지의 경제면은 대폭 늘었고, 경제부는 기자들이 선망하는 부서가 된지 오래고, 경제와 금융을 전문으로 하는 매체는 흑자행진을 이어간다.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뉴스가 무한대로 늘어났지만 경제뉴스 유료화엔 큰 저항이 없다. 문제는 경제뉴스의 영향력에 비해 그 실체가 너무 적게 알려져 있고, 특히 국내 언론의 경제보도는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일기예보나 교통정보처럼 경제뉴스는 정치색이나 이념과는 무관한 사실적인 정보로 인식된다. 실제 코스피 지수가 오르고 내린 얘기, 정부가 금리를 올리지 않기로 한 것, 강남의 부동산이 하락세에 있다는 것은 모두 의심할 수 없는 팩트다. 그러나 경제와 관련한 모든 사건이나 이슈가 뉴스가 되지는 않으며, 이 과정에서선택과 배제는 불가피하다. 또 사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관점이 강조되고 다른 시각은 폄하된다. 경제뉴스는 전문가의 입을 빌어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자들은 훨씬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경제보도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 언론에서 인용된 금융시장 전문가는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이익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부나 기업에서 나오는 정보는 그 자체가 수익 실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외환정책은 수출기업과 수입기업의 이해를 갈라놓는다.

이러한 경제보도를 토대로 형성된 국민들의 여론은 다시 정부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준다. 가령,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추진했던 외국인 투자 유치와 금융시장 전면 개방 등은 언론보도를 통해 축적된 국민들의 트라우마에 업혀 간 측면이 크다. 경제보도에 국제적 통찰력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찍부터 시장경쟁을 통해 경제뉴스의 품격을 고민해 온 영미권과 달리 국내의 경제저널리즘은 국가정책을 홍보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했다. 1980년대 후반 경제일간지 몇 개가 등장하긴 했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 이전까지 경제뉴스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부와 대기업 중심의 뉴스가 많았고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출입처 제도로 인해 경제주체들에 대한 언론의 감시 기능은 미약했으며, 순환 근무로 인해 기자들이 전문성을 키우기 힘들었다. 외환위기 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급속히 편입되면서 보도의 외부 전문가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또 불어 닥친 경영난으로 경제보도와 연계된 광고주의 영향력은 커지면서 편집권의 자율성은 현저히 약화됐다. 언론 자체의 기업화가 진행되면서 언론이 금융시장에 직접 투자하는 빈도가 잦아졌고 객관적인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특히 금융시장과 특정 소비자 집단을 겨냥해 창간된 경제매체들에게 공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한국 경제저널리즘의 취약한 현주소는 지난해 가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을 둘러싼 보도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제뉴스의 전문성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이 다양한 정보원을 통해 제대로 제공되고 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국내 언론에서 G20 정상회담의 의미, 배경, 목적과 전망에 대한 전문적 의견은 대부분 윤증현, 신제윤, 최희남, 안호영, 현오석, 채욱, 정기영, 김주형, 사공일, 이창용 등 정부관료를 포함해 정부와 대기업 산하 연구소를 통해 전달된다. G20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유럽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의 전문가는 물론 국제정치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학자도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국내 언론에서는지난해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출범한 G20 정상회의는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를 대체하는 세계질서 관리의 중심축” (국민일보, 2009/09/25), “국제사회가 선진국 중심의 G8만으론 세계경제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중국 등 신흥공업국과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G20 G8을 대체하게 될 것임을 확인한 것” (한겨레, 2009/09/28) 이라는 입장만 반복된다.

G20
정상회담이 G7을 대신한 새로운 국제적 협의체가 되었고 개도국의 발언권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G20 1976년에 시작된 G7, 1997년의 G22, 1998년의 G33 등과 마찬가지로 선정기준이 자의적이고 국제사회의 대표성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투표권을 기준으로 할 때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란은 당연히 G20에 들어가야 한다. 국제적 금융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출범한 금융안정포럼 (Financial Stability Forum)의 홍콩, 네덜란드, 싱가포르 및 스위스도 G20에는 빠져 있다. 국내언론은 또 G20에 비판적인 UN 총회의 국제 통화 및 금융시스템 개혁 논의(Stiglitz Commission, 2009/9/14)는 물론 남반구센터 위원회(Board Members of the South Centre)의 글로벌 금융체제 재편 선언문 (Revamping the Global Financial Architecture, 2008/10/29) 도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핵심 인사들이 이번 G20 정상회담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지적된 바 없다. 국내 언론은 그 대신 사공일 G20 준비위원장이 “G20 정상회의를 총괄하고 있는 로렌스 서머스 미국 백악관 국제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올해 들어 세번이나 직접 만났다. 마이클 프로먼 백악관 국가안보 차석 보좌관 겸 G20 정상회의 수석 자문역, 존 립스키 국제통화기금 (IMF) 수석부총재도 수시로 접촉했다. 이창용 부위원장은 서머스 위원장의 애제자다” (한국경제, 2009/11/06)와 같은 표면적인 사실만 언급한다.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폴 크루그먼이 지적하듯이 이번 경제위기는 1999년 금융과 산업의 분리원칙을 없앤 금융 현대화(Gramm-Leach-Bliely)법안의 통과와 무관하지 않았고,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서머스와 연방준비위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이 법안의 통과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금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주장한 국제금융기구의 지배구조 개혁, 금융안정망 구축,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 지속가능하며 균형된 성장 프레임워크 구축”(한국일보, 2010/1/29)과 같은 의제들은 미국 정부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조율해 둔 것이었다. 가령 IMF의 유럽 지분을 줄이고 중국과 한국 등 개도국의 지분을 늘리는 개혁안은 회담 주역 중의 한 명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인 프레드 버그스텐이 아시아 위기 직후부터 주장했던 것이다. 다자간 통화스와프 시스템도 1977년부터 시도된 것으로 몇 차례에 걸친 금융위기에서 이미 무기력한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대규모 자금을 인출하기 전에 IMF와 먼저 합의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금융안정망을 구축한다는 것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인 자본 자유화를 늦추지 않고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약 17%에 달하는 투표권을 통해 유일하게 비토권을 행사하고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IMF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 역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라고 볼 수 없다. 미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국제기구들을 통해 국제현안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비용도 최소화한다는 레짐이론 (Regime theory)으로 G20을 바라보는 시각은 국내보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반면 G20 회담은 미국 달러를 대신할 새로운 국제통화의 필요성, 극빈국의 외채부담, 신용평가기관에 대한 규제강화, 금융보호주의 같은 의제들은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G20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아시아 지역주의를 막기 위해 1993년 아시아태평양협력기구 (APEC)를 정상급 회담으로 격상시킨 것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합의 결과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사무국도 없는 심의기구의 한계를 안고 있는 APEC은 아시아 위기가 발발했을 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국내 경제보도의 또 다른 문제점은건전한 비판조차 제기되지 않는데 있다. G20 정상회담을 유치함으로써 한국은 새로운 틀과 판을 짜는 나라가 되었다는 정부의 주장은 국내 언론에서 한국 외교사의 새로운 장’ (중앙일보, 2009/9/28), ‘국격의 상승’ (국민일보, 2010/1/11), ‘룰 추종자에서 룰 메이커로’ (한국경제, 2010/1/12) 등으로 보도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선진국경제협력기구 (OECD)에 가입했을 때도 정부는 이와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당시 OECD 준비단장이었던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OECD 가입은 경제의 재도약, 사회 각 분야의 체질개선을 위한 촉진제가 될 것”(경향신문, 1998/07/27)이라고 말했으며, 유종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도 “OECD가 최근 조직의 효율성을 이유로 회원국을 30개 이내로 제한한다는 방침을 검토하면서 우리나라의 가입을 결정한 것은 그만큼 국운이 뒤따른 것이다“(한국일보, 1996/10/13)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 정부의 성급한 자본시장 개방은 IMF 위기를 불러오는 불씨가 되고 말았다.

한국 정부가 외교적 노력으로 의장국이 되었다는 것도 의문이 있다. 당장 이번 회담의 일등 공신으로 알려진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이 미국에서 만났다는 프레드 버그스텐와 존 립스키는 1993한미 21세기 위원회에 참석해 한국의 OECD 가입과 자본시장 개방을 논의했다. 정상회담 개최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로렌스 서머스와 티모시 가이트너는 IMF의 구조조정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IMF 수석부총재인 존 립스키와 WB 총재인 로버트 졸릭은 각각 JP모건과 골드만삭스 출신이며, 사공일, 김기환, 양수길 등 당시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을 적극 추진했던 인사들 대부분은 외국계 투자회사들이 회원으로 있는 서울 파이낸설 포럼에 소속돼 있다. 우연히도 이명박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발표한 도하개발의제 (DDA)에는 다자간투자협정(MAI)은 물론 선진국에게 유리한 지적재산권 보호, 노동 및 환경조항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반면 금융위기 직후 이명박 대통령이 주장했던 아시아금융협력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학적 배경과 상황 변화를 국내 언론은 추적하지 않고 있다.

  

G20 정상회담이 올 11월 한국에서 열리는 데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993 APEC 회담을 정상급으로 격상시킬 때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폴 키팅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긴밀히 협력했다. 정상급 APEC 회담이 처음 열린 나라는 인도네시아였고, 당시 보고르 회담을 통해 역내 무역 및 자본자유화에 관한 기본 합의가 탄생했다. OECD 가입 직후 외환위기를 맞은 멕시코의 전철을 밟듯 보고르 합의를 이끌어낸 인도네시아에서도 외환위기가 터졌고 대규모 정치폭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하르토 대통령은 사임했다. 퇴임 이후 그는미국과 IMF를 믿은 것이 자기 생애 최고의 실수였다고 고백했고,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 조차도그때 IMF의 처방은 오류였다고 말했다. 보고르 합의가 이루어진 달도 11월인 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